스크랜튼 선교사는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다. 이화학당을 세웠다.

메리 플레처 벤튼 스크랜튼(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한국명 시란돈)은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벨처타운에서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노리치 여학교를 졸업하고, 제철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결혼해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남편과 사별 후 '여성해외선교사회'에 가입한다.
아들 윌리엄은 예일대 졸업 후 의사가 됐으며, 어머니와 함께 한국 선교사(감리교)로 파송된다. 선교사회에서는 메리가 나이 많은 과부라는 이유로 선교사 파송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이 한국 선교에 적극성을 보이며 반대 의견을 돌파한다.

1885년 6월 아들과 함께 조선 땅을 밟은 스크랜튼은 입국 초기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을 여학생을 구했지만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 관리의 첩이 왕비의 통역사가 되겠다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석달만에 그만뒀다. 이후 소녀 1명이 찾아왔고, 소녀를 외국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부모에게 써준 후에야 본격적인 수업이 이뤄진다. 이화학당의 수업은 한글, 영어, 한문, 수학, 성경 등으로 진행됐다.
스크랜튼은 이후 삼일소학당 등 여러 여학교를 세웠고, 진명여교, 숙명여고 등의 설립을 도왔다.
주변에서 미국으로 귀국해 말년을 보낼 것을 조언했으나 한국 선교와 근대화의 뜻을 굽히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다 1909년 이땅에서 눈을 감는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선교사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마련됐다.

메리 스크랜튼의 아들 윌리엄(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한국 입국 직후 광혜원(한국 최초 근대식 병원)에서 일하다 1886년 시병원을 세웠다. 1895년 콜레라 유행 당시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또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이 돼 성서 번역에도 힘썼다.
1917년 일본 고베로 간 후 그곳에서 숨졌다. 그의 묘는 고베 로코산 외국인묘지에 있다. 복음을 들고 고향 미국을 떠난 모자는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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