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

언더우드

whyi 2025. 7. 25. 22:01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미국 선교사들과 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음뿐 아니라 근대 교육과 의학, 사회사업 등을 이땅에 전파했다. 

 

미국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 사회의 엘리트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元杜尤)다. 

 

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안은 세계 최대 타자기 생산업체인 '언더우드'를 소유했다. 1939년까지 5백만 대가 제조됐고, 전성기에는 1분마다 1대씩 만들어졌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부유한 집안의 도움을 받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세웠다.

 

언더우드 타자기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네덜란드개혁신학교에 입학했다. 1883년 장로교 목사가 됐고, 인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있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한다. 조선에 가면 뭘 먹고 살 수 있느냐는 약혼녀의 질문에 그곳에는 주님을 모르는 천만 명이 산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한다고 말해 파혼당한다. 

 

1884년 조선으로 향했지만 갑신정변으로 입국길이 막혀 1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운다. 또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4월5일 부활절에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입국 직후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자 남학교인 원두우 학당(현 경신중고)을 세운다. 1915년 설립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로 발전한다. 발명가이자 재벌인 형 존 언더우드가 학교 토지매입비와 건축비를 지원했다.

 

1886년 3월 개교한 제중원 의학당에서 영어, 물리, 화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제중원 여의사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과 결혼한다. 이들은 신혼여행지로 평안도를 택해 1600킬로미터를 대부분 걸어다니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가운데가 아들인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원한경) 박사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고, 평안도 전도 활동에 힘썼다. 록펠러와 함께 스탠다드오일의 창립 멤버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가 거액을 기부해 세브란스병원을 세웠다. 4대 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한영사전, 한영문법, 한불사전을 편찬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에 크나큰 업적을 세웠지만, 일당백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인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1916년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갔으나 같은해 57세로 소천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모셔졌다.

 

언더우드 선교사 사망 100주년을 맞아 연세대 언더우드 동상을 찾은 언더우드 일가. 언더우드 집안은 4대에 걸쳐 한국의 복음화, 근대화, 독립운동,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다. 한남대, 배재대, 평택대가 모두 언더우드 집안이 세운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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